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이 노르웨이의 숲이 1Q84시리즈 이후 처음이다. 하루키의 소설엔 섹스가 너무 많다. 그의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와 함께 떠올리는 그의 색깔에는 ‘색(色)’이 빠지지 않는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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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에서 성교는 특별함을 부여하기엔 너무 빈도가 많으며 주인공들의 삶 가까이에 존재한다. 육체적 교감의 정점에 위치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으로써 인물들의 정신적 고립과 외로움을 증폭해 보여주는 것처럼 느꼈다. 처음엔 자극적인만큼 쉽게 다가오고 감정에 동화될 수 있지만, 너무 많이 보다보면 거부감이 생기고 지치기 마련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을 정도면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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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난 이 책을 읽기 전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려고 했다. 도서관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빌리려고 하자 친분이 있는 동생이 위의 구절을 인용했고, 이 책에 더 큰 흥미가 생겨 위대한 개츠비를 빌리기 위해 도서관으로 출발한 나는 결국 노르웨이의 숲을 빌려오게 되었다. 지금은 노르웨이의 숲을 다 읽었고, 다음으론 위대한 개츠비를 읽게 될 것이다. 물론 난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에 세 번이나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건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너도 기즈키도 레이코 씨도 이상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내 눈에 좀 이상해 보이는 인간들은 모두 당당히 바깥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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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사람은 없다. 많은 업적을 이룬 위인들도 여러 가지 흠을 가지고 있었다. 고기를 좋아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린 세종대왕님이나 부하직원에게 권한을 거의 주지 않던 스티브 잡스 등에서 쉽게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씩 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드러나 있기도 하고 감추어져 있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이런 흠, 즉 갖추어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상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상실을 감당하지 못하면 나오코나 기즈키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이라고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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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라는 것이 참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며 세상으로부터 숨는 것이 정상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의미없는 일을 반복하면서 불완전한 세상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둘 다 비정상이고, 온전히 정상인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일지도 모른다. 내 기준에서 판단했을 때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정상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모든 주인공들이 각각 특색있는 매력들을 지니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조금 오그라드는 얘기지만,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해서 떠올린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어딘가 비틀어져 있어 답답하지만서도 그들을 매력적으로 느끼고 동정하게 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그들로부터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