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특수요원이 주인공인 영화는 정말 많다. 이런 주인공을 가진 영화를 하나하나 나열할 생각을 하면 너무 많아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머리부터 지끈거린다. 흔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에 더불어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하는 은퇴와, 영화 중반부에서 은퇴를 결정짓게 한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장면 역시 익숙하다. 다른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플롯을 더 나열해 볼까? 아버지나 영웅처럼 따르던 파트너와 후에 대립각을 세우며 미묘한 감정의 혼란을 겪고, 사랑은 약점이 되며 복수는 더 이상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많은 소재들을 다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을 각본과 연출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특수요원을 은퇴하게 되는 사건에서는 은퇴를 결심하게 되는 트라우마가 무엇인지(총에 맞아서? 파트너가 말을 안들어서? 아이가 사고로 죽어서?)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트라우마(어떤 트라우마인지 감도 제대로 못잡겠지만)는 보통 영화 중반 또는 후반에서 특정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에 사용되기 마련인데, 전혀 사용되는 일이 없었다. 초반에 있었던 과거 장면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것 말고는 무엇을 위해 삽입된 건지 알 수가 없다.
평화로운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옛 동료와 임무를 별다른 심리적 갈등도 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부분에서는, 한 사건에서의 트라우마로 인해 은퇴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정년퇴직한 것을 나혼자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메이슨(루크 브레이시)의 데버로(피어스 브로스넌)를 향한 심경변화도 쉽게 공감되지 않아 메이슨의 태도와 결정들은 납득이 어렵다. 존경과 대립이라는 감정이 반대선상에 서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이 휙휙 바뀌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창하려 했지만 거창할 수 없었던 영화다. 영화의 사건들이 거의 다 정리된 뒤에 느닷없이 공개되는 노벰버 맨의 의미는 이 말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뭔가 엄청난 게 있는 것 같았는데도 너무도 납득이 어려운 이름의 의미에서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007은 끝났다!라고 광고하기엔 사랑, 일, 우정 등으로 던지는 무게감이 너무도 떨어졌다. 몇 가지 볼거리로 장식된 킬링타임용 액션영화로 본다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던질 필요도 없다. 킬링타임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가 내 소중한 시간을 다 죽여버렸어!’라고 투덜대서는 안되니까. 하지만 킬링타임 액션영화로써도 아쉬움을 감출 순 없다. 브로스넌 아저씨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한 백전노장의 액션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베테랑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크게 벌어진 상대와의 수준 차이로 보여지는 일방적인 액션에 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욕심이 많아 그릇안에 온갖 재료들을 쑤셔넣긴 했는데, 맛이 조화를 내지 못하고 이상하게 버무려진 실패한 비빔밥같은 느낌의 영화였다.